저는 재림교인은 아닙니다만 친척이 선물한 엘렌 화잇이라는 분이 쓴 책들을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감동적인 글을 쓰신 분이 어떤 분이고, 어떻게 사셨는지 그의 인간적인 면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잇 여사는 마음이 시원하고 너그러우며 쾌활하고 명랑한 여인이었습니다. 화잇 여사가 웃고 있는 사진을 본 일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화잇 여사를 근엄하고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잔소리꾼 할머니 정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웃는 사진이 없기는 19세기 말에 살았던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의 사진 촬영은 포즈를 취하고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했는데, 그동안 내내 웃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다들 엄숙한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었던 것입니다.
화잇 여사는 명랑하고 너그러우며 쾌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피곤에 지칠 만큼 힘든 것이었지만 그녀가 지닌 즐거운 분위기는 주위를 밝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후에 자녀들은 회상하기를 “어머님은 시원스럽게 웃을 줄 아는 분이었고 정말로 재미있는 분이셨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미스 맥켄티퍼가 채소 요리를 화잇 여사 앞에 차려 놓으면서 농담으로 말하기를 “자, 여기 좋아하시는 말 사료가 나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책망을 받을 만한 무례한 말이어서 좌중은 아연 긴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화잇 여사가 “내 말 사료가 여러분의 소여물보다 더 맛이 있을걸요!” 하고 받아넘기자 모든 사람은 폭소하면서 즐거워하였다고 합니다.
화잇 여사의 셋째 아들인 윌리엄 화잇(William C. White)은 예배 시간에 잘 졸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를 “졸음꾼 윌리”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어느 예배 시간에 윌리는 마지막 축도를 맡아 등단하여 내내 졸고 있었는데 설교자가 설교 도중 그에게 무슨 질문을 하려고 갑자기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윌리는 자기의 기도 차례인 줄 알고 앞에 나가 유창하게 마지막 축도를 한 일도 있었습니다. 윌리는 심지어 자기 어머니 화잇 여사가 설교할 때도 졸았던 모양입니다. 뜨거운 8월의 어느 안식일, 화잇 여사는 설교를 하고 있다가 청중 사이에서 웃음이 번져 가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살펴보니 맨 앞자리에 있는 아들 윌리가 머리를 흔들면서 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화잇 여사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아들을 변명하였습니다. “윌리가 아기였을 때 엄마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설교단 밑에다 요람을 놓고는 발로 흔들어 가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윌리에게는 제 설교 음성이 자장가였지요. 윌리가 자는 것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설교 시간에 잠자라고 가르친 것은 엄마인 나였으니까요.” 회중은 배꼽을 잡고 재미있어 했으나 윌리는 여전히 졸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과 천연계를 사랑한 여인
화잇 여사는 아름다운 것들과 천연계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탐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 덮인 로키산맥을 조랑말을 타고 횡단하는 나흘 동안의 배낭여행에 즐겨 참가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언덕과 산과 울창한 상록의 삼림을 사랑한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녀는 “졸졸 흐르는 시내와 협곡을 따라 바위위로 거품을 내며, 마치 하나님께 기쁜 찬양을 부르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급류”를 사랑하였습니다. 태평양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는 일행 모두가 두려워하고 멀미를 했지만 화잇 여사는 오히려 그 모험을 즐겼습니다. 그녀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뱃멀미 때문에 떠나간 후에도 홀로 갑판에 남아서 태산 같은 파도가 부서져 찬란한 무지갯빛을 뿜어내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ST. 7. 18, 1878.)고 기록했습니다.
이웃을 돕고 사람을 좋아했던 봉사의 여인
화잇 여사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을 즐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는 착한 이웃집 할머니였습니다. 화잇 여사가 호주의 쿠란봉에서 살 때는 병원이 80리나 가야 있는 외진 시골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화잇 여사와 간호사 출신인 그녀의 비서는 냉온 찜질과 아울러 숯가루, 올리브유, 유칼립투스 오일 같은 천연 치료제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많은 환자를 낫게 했기 때문에 화잇 여사의 집은 병원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화잇 여사는 의료 봉사뿐 아니라 궁핍한 이웃을 잘 도와주는 분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음식물을 넉넉히 준비했다가 필요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여섯 명의 손님이 예고 없이 들이닥쳐도 문제가 없다고 늘 말하곤 하였습니다. 또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옷감을 끊어다가 직접 옷을 만들어서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어떤 가정을 돕기 위하여 40리를 달려가기도 하였으며, 한 어려운 집안의 아이들 네 명의 학비를 대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화잇 여사는 찾아가서 도울 뿐 아니라 늘 어려운 사람 몇 명을 자기 집에 데리고 있었습니다.
화잇 여사는 중용과 융통성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흔히 화잇 여사는 융통성이 없고 엄격하기만 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오해가 생기게 된 이유는 그녀의 글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그녀의 기별들을 주로 채찍으로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실상 화잇 여사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건강 개혁을 강조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떤 임신한 부인이 그의 남편과 함께 화잇 여사의 식사 시간에 초대되었는데, 그 부인은 화잇 여사가 만든 통밀빵보다는 다른 손님이 가져온 흰 빵을 자꾸만 먹고 싶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부인을 나무라는 표정을 지으며 흰 빵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습니다. 남편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화잇 여사는 얼른 흰 빵을 부인 앞에 다시 가져와서 먹기를 권했습니다. 임신한 그 여인은 감사한 표정으로 그 빵을 맛있게 먹었고 화잇 여사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뜨개질 솜씨가 서툴러 방해만 되는 한 소녀가 화잇 여사를 도와준다고 자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할머니, 제가 하는 뜨개질이 할머니께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고 싶어요.” 화잇 여사는 그 소녀가 뜨개질 한 것들은 나중에 다시 풀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소녀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도움이 되고말고. 네가 하는 모든 일은 나에게 도움이 된단다. 우리는 서로 배워 가야 하니까. 너도 이제 곧 나보다 더 잘하게 될거야.”
그러나 화잇 여사를 완벽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도 성경의 선지자들처럼 실수를 하고, 후회도 하는 연약한 사람이었으며, 울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반대를 당하기도 하고 외로워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란 보통 사람과 무엇인가 많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것을 발견할 경우 크게 실망하지만 선지자란 특수한 사람이 아닙니다. 화잇 여사는 평생 진실하게 하늘과 교통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녀를 선지자라고 믿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글이 성경의 기별과 일치되고 그녀의 아름다운 삶이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입니다. 화잇 여사는 잠들었지만 그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들은 오늘도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