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의 창조주, 근원, 유지자, 통치자이시다. 그분은 공의롭고 거룩하며, 자비롭고 인자하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변함없는 사랑과 진실하심이 한량없는 분이시다. 성자와 성령 안에 드러난 성질과 능력들은 아버지에 관한 계시이기도하다. -기본 신조, 3.
심판의 큰 날이 시작된다. 불붙은 바퀴 달린 화염 보좌가 자리를 잡는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분께서 좌정하신다. 위엄 있는 외모를 지니신 그분께서 심판을 주관하신다. 심판정의 수많은 관중들은 그분의 두려운 임재에 압도당한다. 증인들의 무리가 그분 앞에 서 있다. 심판이 베풀어지고 책들이 펼쳐지며, 인간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 조사를 받기 시작한다(단 7:9, 10).
온 우주는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사악함에 대하여 당신의 공의를 시행하실 것이다. 선고가 내려진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심판)하셨고”(단 7:22). 기쁨의 찬송과 감사가 하늘을 가로질러 울려 퍼진다. 하나님의 품성이 아주 영광스럽게 드러나고 그분의 놀라운 이름이 우주전역에서 옹호된다.
아버지에 대한 견해
성부 하나님은 때때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지상사명과 개인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우리에 대해 어떤 관계에 계시는가? 그분은 은혜로우신 성자, 성령과는 대조적으로 이 세상과 전적으로 동떨어져 계신 분이요, 부재중인 지주, 부동의 원동자(不動의 原動者;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제 1원인인 자)이신가?
또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분은 “구약의 하나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 5:38; 출 21:24 참조)라는 격언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복수의 하나님, 완벽한 행위만을 요구하는 엄격한 하나님이신가? 신약에 나타난 것처럼 다른 편 뺨도 돌려대며 십리까지 동행해 주기를 강조하는(마 5:39-41) 사랑의 하나님과 전적으로 대조되는 하나님이신가?
구약 성경의 아버지 하나님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신구약에 공통적인 구속의 경륜의 통일성은 신구약 모두에서 당신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은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 2). 비록 구약성경은 신성의 각 개체들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그분들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 즉 아들 하나님은 창조의 활동적 실행자요(요 1:1-3, 14; 골 1:16)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낸 하나님이셨다(고전 10:1-4; 출 3:14; 요 8:58)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창조와 출애굽에서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셨던 역할에 대해 신약 성경이 말하는 것은 구약 성경까지도 아들을 대리인으로 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다. 구약 성경은 아버지를 다음과 같이 저술하고 있다.
인자하신 하나님. 죄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출 33:20).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의 행동들과 모세 앞에 말씀으로 그려 보여주신 모습들을 통하여 당신의 품성을 나타내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 7; 히 10:26, 27 참조). 인자하심은 맹목적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공의의 원칙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다. 그분의 인자하심을 거절하는 이들은 악에 대한 그분의 형벌을 거둔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하시려는 소망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라고 말씀하셨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지상 거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앙적 체험의 초점이 되었다.
언약의 하나님. 항구적인 관계 맺기를 갈망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창 9:1-17), 아브라함(창 12:1-3, 7, 13:14-17, 15:1, 5, 6, 17:1-8, 22:15-18; 본서 7장을 보라)과 같은 인물들로 더불어 엄숙한 언약을 맺으셨다(본서 7장 참조). 이러한 언약들은 당신의 백성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준다. 노아에게 그분은 규칙적인 계절의 순환을 보증하셨으며(창 8:22), 또한 전 세계적인 홍수가 다시는 없을 것임을 약속하셨다(창 9:11). 아브라함에게 그분은 허다한 후손들(창 15:5-7)을 두게 될 것과 그와 그의 후손들이 거할 한 땅을 약속하셨다(창 15:18, 17:8).
구속자 하나님. 출애굽의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노예 민족을 기적적으로 자유케 하셨다. 이 위대한 구속적 행동은 온 구약 성경의 배경이며, 또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려는 그분의 갈망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서 홀로 계시는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 우리 일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는 분이다.
시편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사랑으로써 깊이 관여하고 계심에 크게 감동되어 이렇게 기술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3, 4).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 2).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시 22:24).
피난처이신 하나님. 다윗은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무죄한 도피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던 이스라엘의 6대 도피성과 전적으로 같은 분으로 보았다. 시편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피난처”란 주제는 그리스도와 성부를 모두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피난처이셨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시 27:5).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시편 기자는 자기 하나님을 더욱더 갈망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 42:1, 2). 다윗은 경험을 통해 이렇게 간증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 86:15).
용서하시는 하나님. 간음과 살인죄를 범한 후에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를 주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 11)라고 열렬하게 간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은 놀랍도록 인자하시다는 보증에 의하여 위로를 받았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1-14).
선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시 146:7-9)는 분이다. 시편 속에는 하나님의 모습이 얼마나 잘 묘사되어있는가!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분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방황하였다(레 26; 신 28). 하나님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호세아서는 악명 높은 불성실과 배반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를 뼈 속 깊이 느끼도록 묘사한다. 계속해서 용서하시는 모습을 통해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품성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성실 때문에 야기된 재난 속에 들어가도록 허용하셨지만-이는 이스라엘의 길을 바로잡고자 하심이다-여전히 이스라엘을 자비하심으로 감싸주셨다. 그분은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9, 10)고 이스라엘에게 보증하신다. 그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부드럽게 약속하신다.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스린 허물을 자복하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레 26:40-42; 렘 3:12 참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구속적 자세를 상기시키신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1, 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 45:22)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구원과 복수의 하나님. 하나님을 복수의 하나님으로 기술하는 구약적 묘사는 악인에 의해 그분의 백성이 파멸되는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만 한다. “여호와의 날” 주제를 통하여 선지자들은 종말에 당신의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들을 계시한다. 그 날은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 그러나 멸망받게 될 그들의 원수에게는 복수의 날이다.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하라”(사 35:4).
아버지이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연설할 때 모세는 하나님을 그들을 구원해 주신 그들의 아버지로 언급하였다.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신 32:6).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양자로 삼으셨다. 이사야는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사 64:8, 63:16 참조)라고 기록했다. 말라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내가 아비”(말 1:6)라고 확언하셨다. 다른 곳에서 말라기는 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을 창조주로서의 그분의 역할과 관련시킨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 2:10).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 모두를 통하여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진리인가!
신약의 성부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은 만물의 기원자요 모든 참 신자들의 아버지로 계시되어 있으며, 또한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모든 창조물의 아버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분시켜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히 12:9; 요 1:17 참조). 그는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4, 15)라고 증거했다.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 신약 시대에 이러한 영적인 아버지와 자녀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족속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신자 개인 사이에도 존재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관계의 지침을 제시하시는 데(마 5:45, 6:6-15) 이것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확립된다(요 1:12, 13)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통하여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 성령은 이 관계를 촉진시키신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5, 6; 롬 8:15, 16 참조).
예수님은 아버지를 나타내신다.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고 오셨을 때 아버지 하나님을 가장 심오하게 나타내 보이셨다(요 1:1, 14).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어떤 사본에는 독생자)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며(요 6:38),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요 14:9)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개인적 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1-3).
1. 주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우리는 창조에서, 베들레헴에서, 갈바리에서 그분이 주시는 모습을 본다.
창조 시에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행동하셨다. 아버지는 인간의 창조 행위가 결국 당신의 아드님의 죽음을 초래하게 될 줄을 아시고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베들레헴에서 그분은 당신의 아드님을 주신 것처럼 당신 자신도 주셨다. 당신의 아들이 죄로 오염된 이 땅에 들어오실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셨을까! 당신의 아들이 천사들의 사랑과 찬송을 죄인들의 미움과 바꾸시고, 하늘의 영광과 광채를 사망의 길과 바꾸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아버지의 느낌이 어떠했을런지 상상해보라.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 가장 깊이 있게 알게 되는 곳은 다름 아닌 갈바리이다. 하나님이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그와 분리되는 고통을 겪으셨는데 이것은 어떤 인간도 겪어 보지 못한 혹독한 것이었다. 그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똑같은 정도의 고통을 겪으셨다. 그 무엇이 아버지에 대해 이보다도 더욱 잘 증언해 줄 수 있겠는가! 십자가는 어떤 다른 것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2. 사랑의 하나님. 예수님이 좋아하셨던 주제는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충만한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7, 45)고 말씀하셨다.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5, 36).
몸을 굽혀 당신을 배반한 자의 발을 씻기심으로써(요 13:5, 10-14)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의 본성을 계시하셨다.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막 6:39-44, 8:1-9), 귀머거리를 고치시고(막 9:17-29), 벙어리가 말하게 하시고(막 7:32-37),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눅 5:18-26), 문둥병자를 고치시고(눅 5:12, 13),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막 5:35-43; 요 11:1-45), 죄인들을 용서하시고(요 8:3-11), 마귀를 내쫓으시는 모습 속에서(마 15:22-28, 17:14-21)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셔서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전해 주시며, 그들을 자유케 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며, 장차 임할 새 땅을 그들에게 가리켜 보이시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버지의 고귀한 사랑을 계시하는 것이 백성들을 회개로 인도하는 열쇠가 됨을 아셨다(롬 2:4).
그리스도의 세가지 비유가 타락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눅 15). 잃은 양의 비유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제 행동을 통해 이르러 오는 것이요, 우리가 그분을 찾기 때문에 이르러 오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잃었을 때 자기 양을 사랑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처럼, 이보다 훨씬 크게 하나님은 타락한 각 사람을 향해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신다.
이 비유는 우주적 의미를 갖고 있다. 잃어버린 양은 우리의 반역한 세계, 하나님의 광대한 우주 속에서 불과 하나의 원자에 불과한 지구를 대표한다. 우리 지구를 우리 안에 이끌어 들이려고 하나님께서 값비싼 선물이신 당신의 아들을 주신 사실은 우리의 타락한 세계가 그분께는 당신의 나머지 창조물과 같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잃은 주화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크게 값진 존재로 여기시는지를 강조한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통회하는 자녀들을 집으로 환영해 들이신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두고 하늘에 기쁨이 있다면(눅 15:7) 우리 주님의 재림 때 우주가 경험하게 될 기쁨이 어떠할런지를 상상해 보라.
신약은 당신 아들의 재림에 아버지가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재림 때 악인들은 산과 바위를 향해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6)고 외친다. 예수님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오리니”(마 16:27), “인자가 권능(아버지)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말씀하셨다.
갈망하는 심정으로 아버지는 재림을 고대하신다. 그때 구속받은 자들은 마침내 그들의 영원한 본향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는 말씀이 헛되지 않았음이 입증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원수였지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롬 5:10)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측량할 수 없는 이타적 사랑만이 설명해 준다. 감히 어떻게 그러한 사랑을 우리가 떨쳐버리고 그분을 우리 아버지로 시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