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김지혜의 interview-e] 미주한인교회 초석 놓은 조광림 목사

“가라하신 곳으로 갔을 뿐인데 ‘모든 것’ 주신 하나님” 고백

교회뉴스 2024년 9월 27일

삼육대 신학동문회가 주최한 그랜드홈커밍데이에서 ‘자랑스러운 동문’에 선정된 조광림 목사를 만났다. 올해로 여든아홉 살인 그는 미국 로마린다 지역에 살고 있지만 1년에 한 번꼴로 한국에 나와 강의나 설교를 할 정도로 건강하다. 아흔을 앞둔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외모다. 

그는 현재 체육관 건축자금을 모금 중인 모교(한국삼육고등학교)를 위해서도 특별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가족과 친인척은 물론, 딸이 일하는 병원 고객까지 기부금을 보냈다. 로마린다 지역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한국삼육고 동문과 교회 성도 등 약 200명이 기부에 동참했다고 하니 평소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이 그려졌다.  

1936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조 목사는 삼육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2년간 공부를 마치고 군대에 입대했다. 3년6개월의 복무를 마치고 캠퍼스로 돌아오니 신학과가 4년제로 바뀌어 있었다. 제대 후 학업을 이어가던 중 1년이 지난 후 서울 흑석동교회에 부름을 받아 목회의 첫발을 디뎠다. 

아버지 조경철 목사는 당시 중한대회(현재 충청합회) 목회부장이었고, 아버지의 외삼촌인 이근억 목사는 한국에 재림기별이 들어온 초창기 재림신앙을 받아들여 신학을 공부했다. 화잇 여사가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 해인 1915년, 평안남도 순안에 직접 방문한 대총회장에게 안수를 받은 한국 재림교회 최초 안수목사이기도 하다. 이처럼 재림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환경에서 나고 자란 그는 “초등학교 때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을 보면서 그들이 있는 나라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흑석동교회와 해운동교회를 5년간 섬기다 1966년, 서른 살의 나이에 미국 콜롬비아 유니온칼리지에 입학했다. 2년간 공부하면서 엑스레이 기사 자격을 취득해 워싱턴위생병원에서 근무하며 공부했다. 길게는 12시간씩 일할 때도 있었으니 수업까지 들으려면 하루에 3시간 이상 자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려 12년에 걸쳐 공부를 마친 그는 마침내 한국 재림교회 목사 최초로 앤드류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흔두 살이었다. 한국에 돌아오려고 했으나 ‘한국 최초 앤드류스 박사학위 취득자’는 한국 목회자들에게 시험요소와 부담으로 작용했다.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지만 결국 한국 목회 현장에 채용되지 못했다. 


 

당시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서운함은 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세 딸이 한국에서 자라고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각각 의료사역자로, 변호사로, 사업가로서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며 살고 있다고 하니 “역시 내가 설계하는 인생보다 하나님이 설계해 주신 인생이 가장 좋은 길이었다”는 그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1978년, 그는 오레곤주 포틀랜드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포틀랜드교회 한쪽 공간에서 한국인 1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날갯방교회’를 맡은 것이다. 오랜 시간 공부해 박사학위를 마쳤으나 바울처럼 마케도니아로 보내시는 것이라 생각했다. 2년 만에 교인 수는 180여 명으로 늘어났고 오레곤중앙교회로 독립했다. 다시 2년 후 조 목사는 임지를 옮겼지만 오레곤중앙교회는 현재도 350여 명이 출석하는 탄탄한 교회로 복음의 등불을 밝히고 있다.

그 후 로마린다교회에서 사역할 기회가 있었지만, 1985년에 맡은 교회는 구성원 간에 심한 다툼으로 교인들이 거의 떠나 규모가 절반 정도로 줄어든 C 교회였다.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다. 심지어 목사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는 교인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도 몇 년 만에 예전 교인 수를 회복했을 뿐 아니라 큰 성장을 거뒀다. 

1989년에는 A 교회로 가서 성전을 건축했다. 그곳에서 6년간 사역하고 나니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시 300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와 달라는 제안이 왔지만, 그는 또다시 교인 수가 10분의 1로 줄었다는 H 교회를 맡았다. 지금껏 조 목사의 의견을 존중해 준 아내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 놓고 마지막이라도 큰 교회에서 은퇴하면 좋겠는데 또 작은 교회를 간다고 하니 속상하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부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보내심이라 믿으며 열정을 바쳤다. 7개월 후, 교인은 120여 명으로 회복됐다.
어떻게 그렇게 가는 교회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부흥했는지’ 비결을 물었다. 

“한국에서 이민 오는 이들이 많은 시절이었어요. 소위 명문대라는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한국인 목사 중에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찾아왔죠. 학생들에게 다니엘서를 집중적으로 가르쳤고 공부를 마친 후에는 꼭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담임목사와 함께 공부하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니는 교회 담임목사들은 하나같이 ‘다니엘서는 봉인된 책이므로 하늘에 가서 연구해야 한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학생들은 다니엘서 내용이 서양사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재림교회를 선택했다. 학생뿐 아니라 일반 성도도 많이 개혁했고, 잃은양이 되돌아오는 사례도 많았다.

출국에 앞서 조광림 목사는 한국 교회를 향한 애정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노장(老將)의 일침을 들으며 어쩌면 그의 목회 철학이 미국 한인교회 성장과 부흥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나성중앙교회 한 곳뿐이었던 한인교회는 조 목사의 남다른 헌신과 사명이 밑거름되어 현재는 130여 곳으로 늘었다. 

“교회든 기관이든 문제가 생기는 것은 ‘높아지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목사는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낮은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 목사가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면 그 조직은 부흥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조 목사는 “미국의 큰 교회에서 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나라고 왜 없었겠나.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갔더니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셨고, 돌아보니 찬란한 목회 생활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권 국가를 방문하며 10년간 합회장 대리로 일했다. 작은 교회, 쓰러져가는 교회를 마다하지 않고 섬겼던 내게 하나님께서는 남가주합회 부합회장, 아시안부 합회장, 북미주 한인재림교회 협의회장 등의 중책을 맡아 일할 수 있도록 사용하셨다”면서 확실히 자기 뜻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계획은 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게 가장 안전하다”라고 ‘쿨하게’ 답했다. 혹여 후배 목사들에게 남길 당부가 있는지 질문하자 “은퇴는 ‘몸’만 은퇴하는 게 아니라 ‘입’까지 은퇴하는 것”이라며 “물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움은 주겠지만, 늙은이들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길 바란다”고 했다. ‘목회 거장’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와 겸손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하기는 하지만, 조광림 자랑할 것 하나 없다. 절대! 내가 드러나는 기사로 쓰지 말아 달라”는 신신당부에 꼭 그러겠노라 약속은 했지만, 혹시 독자들이 그의 삶을 통해 감동과 감화를 받았다 해도 기자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가 살아온 인생 궤적은 인간적 계획으로 이뤄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