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43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같이 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강도의 영혼은 그날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올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재림교회는 어떻게 해석합니까?
예수께 간청한 강도는 그날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갔는가? 사람이 죽으면 즉시로 천당이나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는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 일 후 예수께서는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요 20:17)다고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것이 문제입니다. 영혼불멸설에 의하면 예수님 같으신 분은 돌아가시자마자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을 터인데 왜 아직 가지 못하셨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좌우편 강도는 처음에는 군중과 함께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은 점점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고 마침내 흉악한 자기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는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23:42)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행악자의 이 소원을 예수께서는 시원스럽게 들어주셨습니다.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가 그것입니다. 십자가의 강도가 그날 당장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갔다면 예수께서는 왜 며칠 후에도 아직 하늘에 가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중요한 주석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한국의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성경 해석에 참고하는 그랜드 종합주석은 누가복음 23:43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강도에게 “오늘” 즉 십자가에서 운명하면 곧바로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는 낙원이 성도가 사후에 곧바로 가는 처소임을 암시한다. 즉 낙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사후에 가서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과 함께 부활하여 영육을 다가진 존재로서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머무르는 “중간기 처소”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낙원에서 사후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그랜드 종합주석, 13:520).
그랜드 종합주석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온건한 주석을 한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부분만큼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임시로 중간 장소인 낙원에 가 있는다는 것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교리로서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연옥을 연상시킵니다. 왜 육체 없는 영혼들만 배회하면서 마지막 구원을 기다리는 낙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또한 성도들에게 필요할까요? 더구나 예수께서 강도에게 분명히 약속하시기를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께서도 천국에는 못 가셨는데 낙원에는 가셨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황당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7 말씀 즉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는 구절을 그랜드 종합주석은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그 해석은 싱겁기 그지없습니다. 만지지 말라는 말은 “내가 하늘에 가서 할 일이 많으니 나에게 매달려서 하늘에 못 가도록 말리지 말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만나 그저 놀라기만 했을 마리아가 예수님이 하늘에 못 가시도록 붙들었을 리도 없을뿐더러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이나 함께 계셨기 때문에 위의 해석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호크마 주석도 역시 “오늘”과 “낙원”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은 천국과 낙원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 구원의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오늘 낙원에 간다”는 말의 구체적 의미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호크마 주석 3:672).
핸드릭슨 주석은 중간 상태인 낙원을 인정하지 않고 천국과 낙원은 같은 말이라는 것을 고린도후서 12장을 예로 들어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에서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말합니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최고의 하늘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입니다. 그런데 12:4에서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7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낙원이 천국이 아니고 영혼들이 육체를 만날 때까지 대기하는 중간 장소라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육체가 없는 영혼들은 생명나무 과일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핸드릭슨 주석은 이렇게 낙원이 즉 천국임을 잘 밝히고 있지만 “오늘”에 대해서는 역시 다음과 같은 약간 애매한 표현으로 설명하고 맙니다. “그는 먼 미래의 축복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날에 속하는 약속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오늘’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누가복음 하권, 408). 핸드릭슨은 아마도 오늘 낙원에 갔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오늘이란 말은 즉각적인 구원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께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그날에 낙원에 가시지 않았으므로 “오늘”이란 말은 그날에 낙원에 갈 것이라는 말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여기서 어떤 의미로 쓰였을까요? 헬라어는 원래 구두점이 없고 단어의 순서 역시 문장 중 어느 곳에 두어도 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때로는 혼란이 오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앞의 문장 “네게 이르노니”에 붙을 수도 있고 뒤의 문장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에 포함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오늘”이 앞의 문장 “네게 이르노니”에 붙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당장 약속하는데 그 나라에 임할 때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강도에게 죽은 후 오늘 당장 낙원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도 그날 낙원에 가시지 않고 무덤에 계셨던 것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낙원에 가지 않으셨으니 강도도 역시 낙원에 가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그날에)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