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늘의 원칙들과 조화되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경건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우리 주님의 품성을 재창조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생애에 그리스도와 같은 순결과 건강과 기쁨을 낳게 될 일들에만 관계한다. 이것은 우리의 오락과 여흥이 그리스도인의 취향과 아름다움의 최고 표준에 맞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문화적인 차이점들은 인정할지라도, 우리의 의복은 단순하고 정숙하고 산뜻해야 하며, 그들의 참된 미가외양을 꾸미는 데 있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부드럽고 유순한 정신을 가꾸는 데 있는 자들에게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육체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명하게 돌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적절한 운동 및 휴식과 더불어 가능한 한 건강에 가장 유익한 음식을 취해야 하며 성경에 명시된 부정한 식품들을 삼가야 한다. 주정 음료, 담배 및 마약과 마취제의 무책임한 사용은 신체에 해가 되므로, 우리는 그것들도 삼가야 한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육체가 우리의 건강과 기쁨과 선량함을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훈육에 부합되게 하는 일에는 무슨 일에나 참여해야 한다.-기본 신조, 22.
그리스도인의 품행, 곧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생활 양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위대한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 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창조주요 구속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그들의 정신적·육체적·영적 능력들을 자진해서 보호하고 계발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요 17:15, 16)라고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세상에 거하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생활 양식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얼마나 달라야 할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생활 양식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다르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칙에 따라 살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그들이 그대로 살기를 원하시는 생활 양식은 그분의 사업을 능률적으로 수행케 만듦으로써 그들을 당신의 피조물로서 충만한 가능성에 도달하게 한다. 세상과 다름은 또한 그들의 사명을 촉진시킨다. 곧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일-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일을 촉진시킨다.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빛이 어두움과 다르지 않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생활하셨으므로 그런 분이 아니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분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원칙들을 생애에 실천하셨으므로 아무도 그분을 죄로 책잡을 수 없었다(요 8:46).
품행과 구원
합당한 품행이 무엇인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 한다. 첫째는 구원의 수단으로서 규칙들을 받아들이고 원칙들을 적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같은 극단을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라는 말로써 요약한다.
정반대의 극단은, 행위로는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어떻게 행하든지 상관이 없다고 한다. 바울은 이같은 극단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갈 5:13)라. 각 교인들이 그 자신의 양심을 따를 때는, “마태복음 18장과 갈라디아서 6장 1, 2절의 말씀에 따라 동료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바로잡는 일이 없게 된다. 그 안에 상호간의 사랑과 보살핌이 있어야 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않고 원자로 된 개인들의 집합체가 되며, 각자는 그의 동료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갖거나 피들을 위한 어떤 관심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자신의 길로 행한다.”*
한편, 우리의 품행과 영성이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올바른 품행으로 말미암아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 품행은 구원의 자연적인 결과이며,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에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에 기초되어 있다.
성령의 전
교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은 성령께서 내재하시는 전(殿)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체의 사령부인 정신, 곧 그리스도의 영께서 거하시는 곳을 보호하기 위하여 좋은 건강 습관을 실천한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지난 100여 년을 통하여 올바른 건강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강조는 성과를 가져왔다. 최근의 연구 결과, 재림교인들은 일반인들에 비해서 거의 모든 주요한 질병을 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적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인간 생활의 영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에 다 관심을 가진다. 우리의 모본이신 예수께서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마 4:23)셨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의 단위로 본다(7장).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분리는 성경 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에의 부르심도 포함한다. 감리교회 창설자의 어머니인 스잔나 웨슬리는 이같은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요약하였다. “그대의 이성을 약화시키고 부드러운 양심을 손상시키며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의 힘과 권위를 감소시킨다. 그러한 일은, 그것이 그 자체로서는 아무리 무구한 것일지라도 나쁜 것이다.”*
건강의 법칙들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은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로 인생을 최선껏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창조주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원수 사단은 우리의 건강과 즐거움과 마음의 평화를 빼앗고 마침내 우리를 멸망시키고자 한다(요 10:10 참조).
완전한 건강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들
이러한 건강을 획득하는 일은 오히려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하나님께서 주신 몇몇 원칙들을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명백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감한다. 올바른 식사와 같은 원칙들은 우리의 생활 양식에 매우 기본적인 적응과 습관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보다 어렵다. 이같은 이유로, 우리는 오해되고 있거나 논쟁의 대상이 되거나 또는 거절되고 있는 그러한 원칙들에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운동의 축복. 규칙적인 운동은 활력을 증진시키며 튼튼한 신체, 긴장 완화, 건강한 피부, 자신감, 효과적인 체중 조절, 소화 작용의 개선, 우울증 및 심장병과 암의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는 단순한 공식이다. 운동은 해도 되고 안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최적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유용한 활동은 번영을 가져오나 무기력과 게으름은 역경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잠 6:6-13, 14:23).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남녀를 위해서 활동, 곧 옥외에서 그들의 가정 정원(家庭庭園)을 돌보는 일을 처방하셨다(창 2:5, 15, 3:19).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육체적인 활동에 대한 모본을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대부분의 생애 동안 목수와 같은, 손으로 하는 노동에 종사하셨으며, 공중 봉사 기간 동안에는 팔레스틴의 길거리를 걸어 다니셨다.*
햇빛의 축복. 햇빛은 생명체에 필수적이다(창 1:3). 그것은 우리의 몸에 자양분과 활력을 주는 영양분을 생산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산소를 방출하는 작용을 촉진한다. 햇빛은 건강과 치료를 증진시킨다.
물의 축복. 인간의 몸은 75퍼센트가 물이나, 이 중요한 액체는 내쉬는 숨과 땀과 배설물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소모되고 있다. 깨끗한 물을 하루에 6컵 내지 8컵 마시게 되면 활기차고 행복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은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되는 것과 그것이 제공하는 이완 작용이다.
신선한 공기의 축복. 가정의 안팎을 둘러싸고 있는 불결한 공기 때문에 혈액은 모든 세포가 최적의 기능을 발휘하는 데 요구되는 산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한다. 이것은 기민하지 못하고 반응이 무딘 사람이 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신선한 공기를 충분히 공급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제, 즉 마약과 홍분제를 사용하지 않는 생활의 축복. 마약은 그것이 자극을 주고 긴장과 고통으로부터 해방감을 준다는 구실로 우리 사회에 침투하였다. 그리스도인도 마약 사용을 부추기는 유혹들에 둘러싸여 있다. 청정한 것처럼 보이는 많은 음료들까지도 마약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커피, 차 및 콜라에는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으며,* 과일 맛이 나는 주정 청량음료들에도 알콜이 포함되어 있다. 연구 결과는 비교적 순한 마약의 사용이 점진적으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더 강한 마약을 사용하게 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현명한 그리스도인은 건강에 해로운 모든 것을 삼가며 오직 유익한 것만을 적절하게 사용할 것이다.
1. 담배. 어떤 형태로든 담배는 신체적·정신적·도덕적 능력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완만한 독약이다. 처음에는 그 영향이 거의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것은 흥분시킨 다음, 신경을 마비시키며 뇌를 약화시키고 흐리게 한다.
담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천천히 자살을 감행하고 있으며,*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는 여섯째 계명을 범하고 있다.
2. 주정 음료들. 알콜은 지구성(地球星)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마약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수백만 사람들을 파멸시켰다. 그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뿐만 아니라 가정을 파괴하고 사고로 인한 죽음과 가난을 초래함으로 사회 전반에 그 대가를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신을 통해서만 우리와 교통하시기 때문에, 알콜은 정신의 모든 기능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체내에 알콜의 함량이 증가함에 따라, 음주자는 조정 능력 상실, 정신의 혼란, 방향 감각 상실, 마비, 무감각증, 혼수 상태, 그리고 죽음으로 발전해 간다. 정규적으로 주정 음료를 마시게되면 결국은 돈을 잃고 판단력과 학습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주정 음료의 사용과 관련된 성경의 이야기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의 사용을 인정하신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혼, 일부 다처 및 노예 제도와 같은 그러한 사회적 관습-하나님께서 분명히 용인하지 않으신-에 참여했음을 지적한다. 그러한 성경절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용인하셨다 해서 모든 것을 반드시 지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모세가 왜 이혼을 허락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이같은 해석 원칙을 지적해 준다. 그분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고 말씀하셨다. 에덴은 복음이 우리에게 회복시켜줄 거룩한 모델이다. 이같은 다른 관습들과 마찬가지로, 알콜의 사용도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하신 것이 아니었다.*
3. 다른 마약들과 마취제들. 그것들을 통해서 사단이 인간의 생명을 파멸시키는 많은 다른 해로운 마약들과 마취제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분의 보혈로 사신 바 된 소유물임을 앎으로써 그들의 몸으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휴식의 축복. 적당한 휴식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지친 제자들에게 하셨던 동정적인 명령을 우리에게도 하신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마 6:31). 휴식기간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필요 되는 많은 고요함을 제공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시 46:10). 하나님께서는 주일중 제칠일을 쉬는 날고 떼어놓으심으로써(출 20:10) 우리에게 휴식이 필요됨을 강조하셨다. 휴식은 잠을 자거나 정규적인 일을 그만두는 것 이상이다. 그것에는 우리가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포함된다. 피로는 반드시 긴장이나 과로 때문에만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 환경이나 질병, 또는 다양한 개인적인 문제들로 인해 지나치게 자극을 받음으로 피곤해질 수 있다.
휴양은 가장 진실된 의미에서 재창조이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에 힘을 주고 튼튼하게 하며 새롭게 한다. 그리하여 신자들로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그들의 일터로 되돌아가도록 준비시킨다. 최선의 생애를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를 강화시켜 주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그런 형태의 휴양과 오락만을 추구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유익한 휴양을 선택하는데 도움이 될 다음의 원칙을 제시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 16).
1.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및 비디오. 이러한 매체들은 위대한 교육적인 도구들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현 세계의 전체 분위기를 바꾸었으며 온 세계의 생활과 사상과 활동에 손쉽게 접촉하도록 만들었다.”* 그리스도인은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개인의 생활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비디오와 텔레비전은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과장된 연기로써 가정에 건전치도 않고 고상하지도 못한 영향을 끼친다. 만일 우리가 식별력이 없고 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가정을 극장이나 값싸고 천박한 가수들의 쇼 무대로 변화시킬 것이다.”* 헌신한 그리스도인은 불건전하고 폭력적이며 감각적인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시청각 매체들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짙은 사악성을 묘사하는 동일한 도구들이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도 한다. 또한 다른 많은 가치 있는 프로그램들도 방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익한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인 관계와 생애의 책임들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무엇을 시청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한 원칙들을 세우도록 할 뿐만 아니라 시청하는 일에 있어서도 시간적인 제한을 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대중 매체들을 선별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 것 같으면, 그것들이 우리의 생애를 지배해서 정신을 오염시키거나 과도한 시간을 소모케 하느니보다는 아예 그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을 훨씬 더 좋다(마 5:29, 30 참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에 관하여, 성경의 중요한 원칙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고후 3:18)른다고 말한다. 바라봄으로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원칙이 또한 부정적인 면으로도 작용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죄와 범죄들-살인, 간음, 강도 및 다른 타락한 행위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들은 오늘날의 도덕의 붕괴에 일조를 하고 있다.
빌립보서 4장 8절에 기록된 바울의 충고는 가치 있는 오락의 형태를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원칙들을 제시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2. 독서와 음악. 이와 동일한 높은 표준은 그리스도인의 독서와 음악에도 적용된다. 음악은 순결하고 고상하고 숭고한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좋은 음악은 품성을 가장 훌륭하게 향상시킨다.
이와 반대로 타락한 음악은 “영혼의 리듬을 파괴하며 도덕성을 분쇄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재즈, 록 음악 또는 이와 관련된 변형된 형태의 멜로디나 어리석고 유치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어떤 언어도 피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외설적인 신학 멜로디로된 음악을 듣지 않는다(롬 13:11-14; 벧전 2:11).*
독서 또한 가치 있는 많은 것을 제공한다. 정신을 계발시키고 넓혀주는 훌륭한 문학이 풍부하다. 그러나 “종종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나 정신과 도덕을 손상시키는 유해한 문학이 홍수를 이루기를 한다. 난잡한 모험과 도덕적인 해이를 조장하는 이야기들은 그것이 실화이든 허구든 간에” 신자들에게는 적합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고상하고 정직하며 순결한 생활 방식을 싫어하게 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도모하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3. 용납할 수 없는 활동들. 재림교회는 또한 도박, 카드놀이, 극장 출입 및 춤추는 일을 피하도록 가르친다(요일 2:15-17). 그들은 광포한 운동 경기를 관전하느라 낭비하는 시간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빌 4:8). 우리와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며 우리로 영원한 관심사를 잃어버리게 하는 활동은 어떤 것이든 우리의 영혼을 사단의 사슬에 얽매이게 만든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그들의 육체적·정신적·영적 성질을 진정으로 새롭게 해줄 그같은 건전한 형태의 여가 활동에 참여할 것이다.
영양분이 있는 음악의 축복. 창조주께서는 최초의 부부에게 이상적인 음식을 제공하셨다.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 1:29). 타락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음식에 “밭의 채소”(창 3:18)를 더하셨다.
오늘날 건강 문제는 퇴행성 질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들은 음식 및 생활 방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곡식과 과일과 견과와 채소로 이루어지는 음식은 최적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영양소를 공급해 준다.
1. 본래의 음식물. 성경은 정결한 동물들을 먹는 일을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본래의 음식물에는 육식이 포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생명을 취하는 일을 계획하시지 않았으며, 건강을 위해서는 균형진 채식이 최선의 음식이라는 사실-이것에 대해서는 과학이 계속적으로 증거를 제시한다-때문이다.*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들어 있는 동물성 식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이 손상을 입을 수 있다.* 매년 미국에서만 검사 과정에서 살모넬라균과 다른 미생물에 의한 오염 상태를 발견치 못함으로 수백만 명이 가금(家禽) 식품 중독으로 고통을 당한다.* 몇몇 전문가들은 “박테리아에 의한 오염이 식품 속에 화학 첨가제가 방부제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며 질병의 발생 빈도도 이 같은 박테리아에 의해서 증가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최근에 실시된 연구 결과는, 증가되는 육류의 소비가 동맥경화, 암, 신부전(腎不全), 골다공증(骨多孔症), 선모충병(旋毛蟲病)을 일으키며 평균 수명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정하신 음식인 채식은 이상적인 음식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그 같은 이상적인 식물(食物)을 먹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한 환경이나 여건에서, 최적의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식물을 먹을 것이다.
2. 정하고 부정한 육류들. 오직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고기를 식품으로 소개하셨다. 모든 채소가 파괴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육식을 허락하시되 고기를 피채 먹지 말도록 규정하셨다(창 9:3-5).
성경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것으로 암시되고 있는 또 다른 규정은 그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정결한 동물로 규정한 것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부정한 짐승은 각 종류대로 오직 한 쌍인데 반하여 정결한 짐승을 각 종류대로 일곱 쌍씩 방주로 데리고 들어가도록 지시하신(창 7:2, 3) 것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음식 뿐만 아니라 희생을 위해서(창 8:20) 정결한 동물이 필요되었기 때문이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은 정결한 식품과 부정한 식품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설명해 준다.*
본질적으로, 부정한 동물들은 최선의 식물이 되지 않는다. 사자와 돼지로부터 독수리와 해저에 서식하는 흡판이 있는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물들이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이거나 육식 동물들이다. 그들의 습성 때문에, 그것들은 질병의 중개자가 되기에 더 적합하다.
연구 결과 “돼지고기와 조개는 상당량의 콜레스테롤을 함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중독시키는 많은 독소들과 오염 물질들을 포함하고 있다.”*
부정한 식품을 삼감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 주변의 타락하고 부정한 세상으로부터 구원받는 일에 대하여 감사함을 나타내었다(레 20:24-26; 신 14:12)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인 몸에 부정한 어떤 것을 들여보내는 일은 하나님의 이상에 못미치는 일이다.
신약은 정하고 부정한 육식의 구분을 철폐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음식물 금기 조항이 레위기서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단지 의문(儀文)이나 의식에 불과하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하고 부정한 동물의 구별은 이스라엘이 존재하기 오래 전인 노아의 시대로 거슬로 올라간다. 이 음식물 금기 조항은 건강의 원칙으로서 계속적인 의무를 수반한다.*
3. 규칙성과 단순성과 균형. 성공적인 음식물 개혁은 점진적으로 지혜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 우리는 고지방 식품이나 설탕이 함유된 음식물은 제거하거나 아주 적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물을 가능한한 단순하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준비해야 하며 최선의 유익을 위하여 일정한 간격을 두고 먹어야 한다. 혼합된 음식과 자극적인 음식은 건강에 가장 좋은 음식이 못된다. 많은 조미료와 양념들은 소화 기관을 자극하며,* 그것들을 습관적으로 사용할 경우 많은 건강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스도인 의복에 따르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최초의 의복을 준비하셨으며, 오늘날 우리가 적합한 의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아신다(마 6:25-33). 우리의 의복 선택은 단순성과 단정함과 실용성과 건강과 활동성의 원칙에 기초되어야 한다.*
1. 단순성.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시는 바 이것은 우리 생애의 다른 모든 부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옷 입는 방법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인 증인에게는 단순성이 요구된다. 구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법으로 정한 요구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으로서 우리가 옷 입는 방법은 세상에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나타낸다.”*
2. 높은 도덕성.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정욕”(요일 2:16)을 일으키는 몸차림으로써 품성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신체의 일부를 강조함으로 성적 욕구를 자극하지 않고 단정한 옷차림과 행동을 할 것이다. 단정함은 도덕적인 건강을 증진시킨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3. 실용성 및 경제성.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돈에 대한 청지기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딤전 2:9)을 피하고 절약할 것이다. 그러나 절약은 반드시 가장 값싼 의복을 구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종 고가품이 장기적으로는 보다 경제적일 수 있다.
4. 건강적일 것. 개인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음식뿐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몸을 적절하게 보호하지 않거나, 압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건강을 악화시키는 그런 방법으로 양향을 주는 옷차림은 피할 것이다.
5. 우아함과 자연미의 특징이 있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이생의 자랑”(요일 2:16)에 대한 경고를 이해한다. 백합화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고 말씀하셨다. 그와같이 그분께서는 하늘이 인정하는 아름다움은 우아함과 단순성과 순결과 자연미로 특징지워진다고 설명하셨다. 일시적인 유행에서 보는 것처럼, 세상적인 과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딤전 2:9).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보이고 그들처럼 행동함으로써가 아니라 매력적으로 신선한 차이점을 보여줌으로써 비신자들은 구원한다. 베드로는 믿지 않는 배우자들이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외양을 꾸미는 대신에 믿는 자들이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계발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도록 권면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다(벧전 3:1-4).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1) 품성은 그 사람의 참된 미를 타나낸다. 베드로와 바울은 둘 다 단장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남녀들을 지도할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한다. “너희 단장은…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벧전 3:3)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 2:9, 10).
2) 단순성은 개혁과 부흥에 조화된다. 야곱이 그의 가족들에게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요청하였을 때, 그들은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넘겨주었다. 그래서 야곱은 그것들을 땅에 묻었다(창 35:2, 4).*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배교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회개하는 가운데 “그 단장품을 제하”였다(출 33:5, 6). 바울은 성경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이 배교를 기록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고전 10:11).
3) 선한 청지기 직분은 희생적인 생활을 요구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영양 부족 상태에 빠져 있는 반면에, 물질주의는 그리스도인들 앞에 값비싼 의복과 자동차와 보석에서부터 호화스러운 집에 이르기까지 유혹의 올무를 놓는다. 생활 방식과 외모의 단순성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인간에 대해서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20세기의 사회에서 이방인들의 탐욕과 물질주의와 화려함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게 한다.
앞서 열거한 이같은 성경의 교훈과 원칙들에 비추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석으로 단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것이 반지, 귀걸이, 목걸이, 팔찌, 화려한 넥타이 핀, 커프링 및 장식 핀과 그리고 그 주요 기능이 과시하는 데 있는 어떤 유형의 보석이든지 그런 것들은 불필요하며 성경이 요구하는 단장의 단순성과도 조화되지 않는다고 이해한다.*
성경은 화려한 화장도 이교주의 및 배교와 관련짓는다(왕하 9:30; 렘 4:30). 그러므로 우리는 화장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연 상태의 건강한 모습을 지녀야 한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옷 입는 방법에 있어서 구주를 높일 것 같으면, 우리는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끄는 자석처럼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표준의 원칙들
그 모든 표명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께서 사신대로 생애 하려고 한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을 “하지 말라”는 것의 목록으로 간주할지라도,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구원의 구조 속에서 활동하는 일련의 긍정적인 원칙들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얻도록 당신께서 오셨다고 강조하셨다. 우리를 충만한 생애로 인도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 성령께서 개인의 생애 가운데 들어오실 때, 그 사람의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나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요 3:8). 성령께서는 생애에 최초의 변화를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영향은 계속적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갈 5:22, 23). 그리스도교의 정당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삶.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유리하거나 불리하거나 간에, 우리는 온갖 상황 하에서도 그리스도의 뜻과 정신에 조화되게 생각하고 생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전 2:16).
엘렌 G. 화잇은 그리스도와 이같은 관계 속에서 생애하는 삶의 아름다운 결과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든 참된 순종은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것은 마음이다. 만일 우리가 동의한다면 그는 우리의 사상과 목적을 당신 자신과 완전히 일치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당신의 뜻과 일치하도록 화합시키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받은 자극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다. 세련되고 성화된 의지는 그를 봉사하는 일에서 최고의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에 우리의 생애는 계속적인 순종의 생애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존중하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우리들은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삶.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행하셨다. 우리의 감사를 나타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찬양을 통해서이다.
시편은 영적 생애의 이 같은 면을 크게 강조한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시 63:2-5)리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찬양의 태도는 생애의 다른 문제들도 적절하게 조화되도록 할 것이다.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구속하사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구주를 바라봄으로, 오직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요일 3:22; 엡 5:10과 비교) 행하고자 하는 동기가 마음속에 유발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고후 5:15) 산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행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바라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첫째로 삼는다. 그는 그의 구주 앞에 다른 아무 신(神)도 두지 않는다(고전 10:31).
모본이 되기 위하여 삶. 바울은 누구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전 10:32)라고 말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 만일 우리의 그릇된 모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다른 사람들에게 거치는 돌이 된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봉사하기 위하여 삶.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현재 사는 방식대로 사는 주요한 이유는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모든 일에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많은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0:33, NIV; 마 20:28과 비교).
요구 조건들과 지침들
사람의 생활 방식이 그의 영적 경험과 전도(傳道)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교회라는 조직체로서 우리는 신자가 되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들로서 일정한 생활 양식을 표준으로서 제시한다. 이러한 표준들 가운데는 담배, 술, 정신을 착란시키는 화학 물질 및 부정한 육식을 삼가는 일과, 의복과 여가의 활용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성숙된 그리스도인 경험의 증거가 포함된다. 이러한 최소한의 표준들은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이상(理想)을 다 포함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단순히 성숙해 가는 빛나는 그리스도인 경험을 계발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첫 단계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표준들은 또한 신자들의 공동체 내에 연합을 가져오는 데 필수적인 기초를 제공한다.
그리스도인 품행의 계발-“하나님처럼 되는것”-은 점진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와의 일생동안의 연합을 포함한다. 거룩한 생활이란 바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지배에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이며, 성경 연구와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교훈들을 계시하실 때 날마다 그것들에 일치시키는 삶인 것이다. 우리 각자의 성숙도가 다르기 때문에, 보다 연약한 형제와 자매들을 판단하는 일을 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롬 14:1, 15:1).
구주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한 가지 이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처럼 풍성한 계획을 마련하신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자 할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